|
제목
|
스타베팅 이용후기
|
|
작성자
|
스타
|
|
작성일자
|
2023-10-01
|
|
조회수
|
201
|
헤르시스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핵심만 보고해.”“제이든 칼톤이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황후 궁에 들렀답니다.”이샤르가 말했다.헤르시스의 시선이 그제야 그를 향했다.그의 냉엄한 시선이 묻는 바를 눈치챈 이샤르가 보고를 이었다.“신관 자격으로 방문하셨습니다. 신관은 대륙의 어느 곳이든 자유로이 오갈 수 있으니까요.”“나도 신관이나 할 걸 그랬군.”헤르시스가 팔짱을 끼고 의자 깊숙이 기댔다.“그게 그렇게 엄청난 특권인 줄 알았다면 말이지.”그 말에 이샤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원만하게 넘어가는가 싶었다.“쫓아 보내.”“…….”“허락도 없이 황후 궁에 들렀는데 이 정도 처사면 꽤 관대하지?”‘웬일인가 했네.’이샤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언했다.“왕자로 왔다면야 쫓아 보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신관일 경우엔 다릅니다. 루젠시아의 역사가 신전의 축복으로 시작되었음을 잊으셨습니까?”“…….”“장차 황후가 되실 분을 축성하기 위해 찾은 신관을 내쫓는 것은 반대 세력들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는 일일뿐더러, 제국민의 통합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헤르시스가 혀를 쯧-, 찼다.통치 외적인 것에 너무 많은 눈치를 보는 이샤르는 자신과 참 맞지 않았지만, 틀린 데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이샤르가 없었다면 그는 즉위하자마자 평의회를 해체시키고 귀족제도 갈아엎었을 것이다.신전의 위세도 그런 식으로 꺾어 놓았을 것이다.국혼 기일과 같은 황실의 대소사를 어째서 매번 신전과 상의해야 하지?그들이 제가 숙부와 원로들의 손에 놀아날 때 뭘 해 줬다고.하지만…… 결국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명심해라, 헤르. 굽힐 줄 모르면 부러지는 법이야.’헤르시스는 부군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고집을 꺾었다.“접견 시간이 십 분을 넘기지 않도록 해.”“알겠습니다.”이샤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군이 고집을 접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며 물러났다.“신전이라…….”혼자 남은 헤르시스가 깍지 낀 손을 뒷머리에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그에게 신전은 성스러운 장소라기보단 음침한 무덤이었다.켜켜이 쌓인 비밀을 봉인해 둔 무덤.신관들은 신에 대한 비밀보다 인간에 대한 비밀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추악한 면을 그들에겐 거리낌 없이 털어놓곤 하니까.“숙부도 비밀을 털어놓았을까?”헤르시스는 문득 궁금해졌다.***‘원래는 당신이 아니잖아.’다섯 번만 더 되뇌면 백 번을 채울 듯싶었다.‘무슨 뜻이지? 뭐가 내가 아니라는 거지?’그 자문 역시 백 번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수많은 목소리가 리즈의 머릿속에서 답을 이야기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정답은 아니었다.당연했다.목소리가 정답을 말하려 할 때마다 리즈가 그 입을 틀어막았으니.이제 그만 입을 풀어 줄 때였다.‘알고 있는 거야. 내가…… 내가 원작 여주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거야.’그러지 않고선 그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대체 그 사람은 누굴까? 혹시 또 다른 빙의자일까.만약 그렇다면, 그자가 헤르시스에게 진실을 말할까.자신이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서 운명을 바꿔 원작 여주의 자리를 꿰찼다고?‘사실이 아니잖아. 나는 그럴 목적으로 바꾼 게 아니었어.’갖가지 생각이 리즈를 혼란 속에 가두고 고문해 댔다.그때였다.“리즈?”“허억!”갑작스레 어깨에 놓인 손이 불에 달군 인두라도 되는 듯, 리즈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렸다.헤르시스가 둥그렇게 뜬 눈으로 리즈를 내려다보았다.“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놀라지?”“아…… 아니에요. 아무것도…….”의심을 사지 않도록 리즈가 황급히 덧붙였다.“언제 오셨어요?”“조금 전에.”“아…… 네.”어색한 대답과 함께 리즈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헤르시스는 그런 리즈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고선 안락의자로 이끌었다.그녀를 자리에 먼저 앉히고서 자신은 맞은편에 앉았다.“낮에 신관이 다녀갔다면서?”그 말에 리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네…… 잠깐.”“무슨 얘기했어?”“겨…… 결혼 축하드린다고요. 그리고 선물도 줬어요. 무슨 약초 액이라나 뭐라나. 귀한 거라고, 해독제로 쓰인댔어요.”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그대에겐 별로 필요가 없겠군. 그대 입에 독이 들어갈 일은 없을 테니.”“그러네요.”리즈는 헤르시스가 제 식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에 은식기를 담그도록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 그건 폐하 가지실래요?”“됐어. 내 음식에 독을 탈 간 큰 인간이 어디 있다고.”하긴.“그대 가지고 있어. 아니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로 줘도 되고.”“네…….”그 순간 불현듯 원작의 한 조각이 리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래, 맞아. 원작에서도 여주에게 똑같은 선물이 들어왔고, 자기는 약초 액 따위 필요 없다면서 누군가에게 줬어.’몬타네르 대공에게 주었다!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가진 릴리아는 정적들과 대립하기보단 선물 공세나 식사 초대 같은 유화 정책을 써서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몬타네르 대공의 적개심 역시 그런 식으로 달래려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하지만 그편이 해피 엔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그 고민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이 우선이었다.‘원래는 당신이 아니잖아.’그 말이 망령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리즈는 넌지시 물었다.“그…… 칼톤 왕국의 왕자님은 어떤 분이시죠? 왜 신관이 되신 거죠?”헤르시스가 대답했다.“왜 신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태생적으로 예지 능력을 갖춘 자라고 알고 있어. 앞날을 몇 번인가 맞췄다더군.”“아…… 예지 능력이요.”“그곳 백성들은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자신들의 왕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몹시 기뻐했지. 당연해. 백만 군사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위력을 가졌으니.”“…….”“왕은 기대했어. 그자가 장차 왕이 되어 왕국을 루젠시아에 버금가는 대제국으로 만들어 주기를. 하지만, 뜬금없게도 그자는 갑자기 신관이 되겠다며 후계 위를 동생에게 넘기고 신전에 입적했지. 분노한 왕은 아들과의 절연을 선포했지만, 아직도 간간이 만나고는 있다더군.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야.”“그렇군요.”“근데 왜 갑자기 그자에 대해 묻는 거지?”헤르시스가 물었다. 그는 그런 걸 물을 만했다.리즈는 이제껏 그가 아닌 그 어떤 남자에 대해서도 먼저 묻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냥…….”궁금해서요…… 라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왜 갑자기 궁금해졌냐고 물을 테고, 그럼 또 어설픈 변명을 해야 할 테고…….‘결국엔 삐져 버릴 테지.’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그냥 알아 두려고요. 황후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황후로서의 소임……. 참으로 유용한 핑계였다.헤르시스의 굳은 눈매가 서서히 풀어지는 걸 보며 리즈는 안심했다.‘그나저나 예지 능력이라…… 또 다른 빙의자는 아니란 말이구나.’그 사실만은 못내 다행이었지만,‘그래도 역시, 그가 바라본 앞날에 나 같은 황후는 없었단 말이지?’리즈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이제 겨우 원작 여주의 틀에서 벗어나 제 의지대로 한 발자국 내디뎠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남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자괴감이 언제까지고 자신을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그렇게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느라 헤르시스의 눈빛이 제 도톰한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리즈는 몰랐다.***헤르시스는 어젯밤의 그 황홀한 그 키스를 다시 나눠 보고 싶은 충동에 하루 종일 힘들었다.달콤했던 입맞춤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농밀했던 교감이 온종일 그의 뇌리를 잠식해 업무에 집중도 할 수 없었다.그는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경멸스러운 원로들과의 지루한 회담도 버텨 내게 했다. 그런데.‘그 칼톤 왕국의 왕자님은 어떤 분이시죠? 왜 신관이 되신 거예요?’리즈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신관에 대해서만 묻고, 그게 아닐 땐 다른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다.이럴 땐 자신에게 독심술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헤르시스는 생각했다.이 여자의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고 자만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득한 꿈속의 일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리즈? 무슨 생각해?”헤르시스는 리즈가 말해 주지 않으면 이제 그녀의 생각 한 줌도 알아내지 못하게 되었다.“아…… 아무 생각도 안 해요.”제길. 모르게 하려면 아예 모르게 하던가.어렴풋이 저 말이 거짓이라는 정도만 알게 하는 건 또 뭐지?“저, 죄송하지만 폐하, 오늘은 이만 가 주시면 안 될까요? 국혼 준비에 손님맞이에 황후 수업까지 들었더니 좀 피곤해서요. 죄송해요.”그 말에 헤르시스는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려나.절망적이라는 점에선 둘 다 맞는 것 같았다.그는 차마 고집부릴 수 없었다.오늘의 리즈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겨우 마음을 열었는데 이제 와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수는 없었다.“그래…….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헤르시스는 리즈의 곱슬곱슬한 적발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그 부드럽고 애정 넘치는 모습은 처소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사라졌다.흉흉해진 눈빛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돌연 뒤를 돌아 자신을 뒤따르는 시중인들에게 지시했다.“내일부터 황후 궁에 절대 손님 들이지 말도록.”“예…… 예…… 폐하.”“국혼 준비는 궁내부에서 알아서 하라 하고, 황후 수업도 절반으로 줄여.”“예…… 폐하.”살벌한 눈빛과 말투에 겁먹은 시중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복종했다.기대가 좌절된 헤르시스는 속에서 맴도는 열기 때문에 힘들었다.그는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킷을 벗어 근위대원에게 주었다. 그리고 얇은 셔츠 차림으로 가까운 오솔길을 거닐었다.셔츠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가 한겨울 못지않게 싸늘했지만 그에겐 딱 좋았다.열기가 식으니 비로소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다.‘이상한 일이야. 분명히 어젯밤엔 그녀도 유희를 즐기는 것 같았는데. 설마 연기였나?’헤르시스는 고개를 저었다.자신이 아는 리즈는 연기란 걸 모르는 여자였다. 욕망에 솔직한 여자였다.‘그럼 뭘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답답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던 찰나였다. 돌연 헤르시스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오솔길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하얀 튜닉에 허리에는 금실을 꼬아 만든 허리띠를 두른 훤칠한 남자였다.그가 다가와 두 손을 공손히 합장하며 제 나라말로 인사를 올렸다.“[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헤르시스는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못 알아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그는 대륙의 거의 스타베팅 왕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니까.그가 주목한 건 그 독특한 언어와 악센트가 아니라 제이든 칼톤의 얼굴이었다.백금발에 아콰마린 색 눈동자. 부드럽게 처진 눈매, 그리고 소년처럼 생글거리는 미소.그 얼굴에서 헤르시스는 케인을 보았다.리즈도 같은 것을 보았을 터였다.‘죄송하지만 폐하, 오늘은 이만 가 주시면 안 될까요?’한순간에 모든 이유가 설명되었다.
|
|
